当前位置: X-MOL 学术Art History › 论文详情
Our official English website, www.x-mol.net, welcomes your feedback! (Note: you will need to create a separate account there.)
Investigation of Kiln Sites and Signification of Research on Goryeo Celad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Art History ( IF 0.3 ) Pub Date : 2017-02-28 , DOI: 10.14769/jkaahe.2017.02.33.155
Eunjung Cho

일제강점기는 한국미술사의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기존 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당시의 요지(窯址) 조사와 고려청자 연구가 어떠한 배경속에서 시작했으며 시기별로 어떤 변화를 보이고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당시 요지조사와 고려청자의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가 설정한 조선예술쇠망론의 식민사관과 식민지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조사라는 큰 틀에서 시작되었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강진을 비롯하여 공주 학봉리, 광주 분원리, 부안 유천리·진서리, 고령사부동·기산동 등 중요한 요지 대부분이 조사되었으나, 현재 각 요지의 발굴보고서는 공주 학봉리를 제외하고는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1914년 강진 요지 발굴자료도 다른 논문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모든 발굴보고서는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각 요지의 발굴조사보고서 부재(不在)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의도적인 자료 폐기 또는 누락를 추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요지조사 자료 축적과 함께 50여 년간 시기별로 변화를 보였다. 19세기부터 1900년대는 본격적인 요지조사가 실시되기 이전으로 고려청자는 고가의 골동품으로서 수집과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시기이다. 전세품(傳世品)이나 개인적인 수집품만을 분석하여 한국 도자기의 역사를 관념적인 시각에서 계보(系譜)를 정리하고 종류를 구분하였다. 이후 1910-1920년대에는 일본의 대외확장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이다. 도자기 연구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요지 현황파악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나 여전히 감상도자(鑑賞陶磁)라는 관점도 유지되었다. 특히 도아회(匋雅會), 도자기연구회(陶磁器硏究會), 채호회(彩壺會) 등을 중심으로 감상, 품평활동과 도자사적인 연구를 병행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청자를 도자산업 진흥을 위한 중국 도자기 연구의 부수적인 연구대상으로 다루면서 비색청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기술적 요인과 문양소재의 원류를 찾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28년과 1933년 각각 강진과 부안 청자요지가 발굴되면서 1930년대부터 1945년 까지는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고려시대의 시기별 변화, 고려와 중국의 문헌사료 분석, 소비지 출토 편년(編年)유물, 간지(干支)명을 비롯한 명문(銘文)청자 연구 등으로 연구범위를 확대해갔다. 오늘날의 도자사 연구, 문헌사 연구, 고고학적 연구와 같이 분야가 세분화된 단행본들이 출간되었다. 그중에서 나카오 만죠(中尾万三)는 중국 도자기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중국과 고려의 영향관계, 원류 규명, 시기구분 등 미술사적 시각에서 연구한 반면, 노모리 켄은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세부항목으로 분류하고 정리,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광복 이후 국내 도자사 연구의 토대를 형성했다.

中文翻译:

日本殖民统治时期高丽青瓷窑址考察及研究意义

일제강점기는한국미술사의출발점이라는시각에서기존논문에서다루지않았던당시의요지(窑址)조사와고려청자연구가어떠한배경속에서시작했으며시기별로어떤변화를보이고그내용은무엇이었는지에대해살펴보았다。당시요지조사와고려청자의연구는일본제국주의가설정한조선예술쇠망론의식민사관과식민지에대한인류학적자료조사라는큰틀에서시작되었다。1910년대부터1930년대까지강진을비롯하여공주학봉리,광주분원리,부안유천리·진서리,고령사부동·기산동등중요한요지대부분이조사되었으나,현재각요지의발굴보고서는공주학봉리를제외하고는확인할수없는한계 있다。그러나1914年년강진요지발굴자료도다른논문에서단편적으로확인되기때문에모든발굴보고서는작성되었던것으로보인다。그렇기때문에각요지의발굴조사보고서부재(不在)는조선총독부박물관의의도적인자료폐기또는누락를추정하는근거이기도하다。고려청자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요지조사 자료 축적과 함께 50여 년간 시간 시과 연구는요지조사 19세기부터1900년대는본격적인요지조사가실시되기이전으로고려청자는고가의골동품으로서수집과감상의대상으로여겨지던시기이다。전세품(传世品)이나개인적인수집품만을분석하여한국도자기의역사를관념적인시각에서계보(系谱)를정리하고종류를구분하였다。이후 1910-1920년대에는 일본의 대외확장에 따라 식민지에 도자기연구는고고학적발굴을통한요지현황파악과조사를바탕으로한것이었으나여전히감상도자(鉴赏陶磁)라는관점도유지되었다。특히도아회(匋雅会), 도자기연구회(陶磁器硏究会), 채호회(彩壶会) 등을 중심으로 감상, 품평활동과 도자사적인 연구를 병햊했다이.이 고려청자를도자산업진흥을위한중국도자기연구의부수적인연구대상으로다루면서비색청자를생산할수있었던기술적요인과문양소재의원류를찾는논문이발표되기도하였다。1928년과1933년각각강진과부안청자요지가발굴되면서1930년대부터1945년까지는그동안의조사결과를토대로고려시대의시기별변화,고려와중국의문헌사료분석,소비지출토편년(编年)유물, 간지(干支)명을비롯한명문(铭文)청자연구등으로연구범위를확대해갔다。오늘날의 도자사 연구, 문헌사 연구, 고고학적 연구와 같이 분야이 분야사 세분화됤본별분화됤볐볐별이 그중에서나카오만죠(中尾万三)는중국도자기역사에대한지식을배경으로중국과고려의영향관계,원류규명,시기구분등미술사적시각에서연구한반면,노모리켄은고고학적조사결과를 세부항목으로 분류하고 정리, 비교하는 방식이었다。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광복 이후 국내 도하서혀하하서혀하하서하의하다른 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오늘날의 도자사 연구, 문헌사 연구, 고고학적 연구와 같이 분야이 분야사 세분화됤본별분화됤볐볐별이 그중에서나카오만죠(中尾万三)는중국도자기역사에대한지식을배경으로중국과고려의영향관계,원류규명,시기구분등미술사적시각에서연구한반면,노모리켄은고고학적조사결과를 세부항목으로 분류하고 정리, 비교하는 방식이었다。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광복 이후 국내 도하서혀하하서혀하하서하의하다른 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오늘날의 도자사 연구, 문헌사 연구, 고고학적 연구와 같이 분야사 세분화됤본별분홋됤본본이 그중에서나카오만죠(中尾万三)는중국도자기역사에대한지식을배경으로중국과고려의영향관계,원류규명,시기구분등미술사적시각에서연구한반면,노모리켄은고고학적조사결과를 세부항목으로 분류하고 정리, 비교하는 방식이었다。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광복 이후 국내 도하서혀하하서혀하하서하의하다른 서로 다른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취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연구 방식을
更新日期:2017-02-28
down
wechat
bug